정리해 두어야 할 것이 생겼다. 이것이 나의 교만한 작위적 생각이 아니라면 좋겠다.
요즘 머리속에 맴 돌고 있는 성경의 조각들.
어쩌면 내가 지금 이해하고 있는 기독교 또는 신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이브를 에덴 동산에 두셨다 한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바랐던 것은 간단했다. 생육하고 여기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라 단 선악과만 먹지 마라. 한마디로 선악과만 먹지 않으면 너 하고 싶은것 하며 즐겁게 살아라이신거다. 성경에서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 에덴동산의 나무는 두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하나가 생명나무이고 다른 하나가 선악과이다. 하나님은 선악과만 먹지 말라 하셨다. 이말은 아담이 원했으면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도 얼마든지 주실 생각이 있으셨던 거다. 하지만 아담은 결국 선악과를 먹게 되었고 자신이 벗은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게 되었고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이것이 죄의 시작이라고 본다. 아담-한사람의 인간-에서 시작된 죄가 전 인류에게 원죄라는 멍에를 씌웠고 그것을 회복하러 예수께서-한사람의 인간- 오셔서 죄 사함을 주신 것이다.
원죄는 관두고라고 교회를 다니면서 우리는 죄인이라며 모두들 안타까워 하며 기도하며 눈물을 쏟아대는 친구들을 보면서 그들의 성숙한 믿음이 부러우면서도 내 머리로는 도적히 납득이 안되었고 내 가슴으로는 동조되고자 하였으나 어느정도 그런 감정이 생길때 내 머리는 나를 가로막고 산통을 깨기를 반복하면서 나는 죄인의 이론과 감성은 아직은 내가 어쩔 수 없는 분야로 남겨 놓게 되었다.
예수님에 대하여 생각할때면 예수님도 하나님의 성품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원하는게 심플하셨을 거란 생각을 계속 하게 된다. 너무 심플하기 때문에 굳이 경전이나 기록을 남겨 두시지도 않은 것이고. 그래서 남기신 것은 모든 율법을 하나로 표현하는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너 자신을 사람함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이다. 다시 아담의 이야기를 해 보자면 아담의 잘못은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그 말은 선악을 분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선악을 분별하기 시작한 건 우리가 생각하기에 죄가 아니다. 오히려 악이 무엇인지 깨닫고 멀리 하기 위해 선악을 분별하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원죄는 선악을 분별하는데서 나왔다. 선악은 우리가 분별하지 않으면 없는 것이다. 없이도 잘 살 수 있고, 아니 없어야 우리는 에덴 동산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상을 가장 잘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애초에 선.악.은 없는 것이다. 개인의 입장차만 있는 것이다. 개인의 입장차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선이나 악이라는 잣대로 판단하고 다른 이들을 나의 판단속에 가둬버리게 되면 하나님의 만든 세계가 아닌 본인이 만든 세상에 갇혀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으로 결국 자신을 판단하며 나는 벌거 벗고 있는 창피한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선악을 알게 된 아담과 이브를 에덴 동산에서 쫓아 내신 것은 그들이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을까 염려하셔서 천사까지 세워 동산의 입구를 잠그셨다. 처음 든 생각은 하나님이 자신이 만든 창조물이 선악을 분별하고 (자신과 같은 능력을 갖게 되고) 그런 능력있는 존재가 영원하게 살게 되면 자신에게 위협이 될까 질투하신다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경을 읽다 보면 은근히 그런쪽으로 해석하게금 문맥이 흐른다. 하지만 하나님은 선악을 분별하며 다른 이를 판단하고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버려) 행복하지 않은 삻을 살아가는 창조물을 걱정하신 것이라고 본다. 저런 상태로 영원히 사는 것이 지옥, 그야말로 악한 삶이 될테니.
하나님이 처음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선악과 먹지 마라 였다. 여기서 예수님의 구원을 이해하게 된다. 율법이 자꾸 덧붙여서 생겨나는 것은 세상이 점점 변하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해 해석과 적용이 필요해서다. 그리고 무엇무엇 하지 마라 라는 계명은 점점 살을 붙여 나가게 된다. 어떻게 하지 말아야 하는지 어느정도까지가 하는 것이고 어느 정도까지가 하지 않는 것인지 언제해도 되고 하면 안되는지 세세하게 분화되고 그것에 초점이 맞춰져 버린다. 처음에 십계명에서 시작한 율볍이 유대인의 경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 과정도 이런 이유가 크지 않을까 싶다. 예수님은 이런 율법에 파묻혀 멀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모든 율법은 사랑 "하라"로 통합된다고 뒤집으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에 대한 방법은 네 마음과 정성과 온 힘을 다해서이다. 이것은 목사님에게 물어보는 것이 아니고 교회 오빠에게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니가 생각하기에 니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면 된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나 개인에 대해 생각해 보라라는 것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도 방법이 있다. 네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라는 점에서 또 한번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하신다. 막연히 네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라는 말씀을 들을때는 이웃을 최고로 열렬히 사랑하라는 말씀이구나 생각해서 참 어렵고 뜬구름 같다는 느낌이 강했었다. 하지만 내가 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나 생각해 보게 된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이 사랑인지 애증인지 증오인지 미움인지 사실 구분하기 힘들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에 대해 아주 만족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난 아직도 멀리 또는 가까운 과거에 내가 했던 말도 안되는 말들이나 상황들이 머리속에 싸악 지나갈때면 나도 모르게 아이구! 소리가 절로 나온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이상향은 너무도 큰데 현실적으로 그 이상향에 조금도 가까워 지지 못하는 나를 보면 내가 참 싫고 나만 잘못 살고 있는 것 같고, 세상에서 내가 제일 어리석은 것 같고,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각자 어떠한 모습으로 성장하며 잘 살고 있다고 느껴진다. 이런 나를 나는 과연 사랑하고 있는가? 이정도만 이웃을 사랑하면 되는 것인가? 이건 사랑이 아니라 한심해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조금 머릿속이 어지러웠지만,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기에 그럼 이웃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나 자신부터 사랑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많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과거의 실수, 이상적 나의 모습과 현실과의 괴리, 남들과의 비교 등, 이런 것을 넘어서 나를 사랑하려면 용서하는 것이 답이 아닐까 생각 하게 되었다. 과거 실수도 사람이니 그럴수 있어 용서하고, 현실적 나의 초라한 모습도 용서하고, 남들보다 못한 나도 용서를 하고 내가 생각하기에 잘 한 일들에 대해 솔직히 만족해하고, 이러면 날 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조금 더 구분해서 보면 용서하고 칭찬하라 아닐까. 그 말은 곧 내 입장에서 다른 사람을 선. 악. 으로 분별하지 않는 것 아닐까?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하신 것 같다. 아주 간단하고도 강력한 말씀으로.
결국은 남을 바라보지 말고 자신을 바라보는 생활이 되야 하는 것 같다. 남들이 멀 하는지 살피기보다는 내가 멀 하고 싶고 잘 하고 있는지, 내가 갖고 있는 기준이 정말 나의 기준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니 그냥 비판없이 받아들인 것은 아닌지. 나 자신에 대해 집중하고 반성하고 용서하고 성장하고 사랑하다 보면 다른이에게 특별히 바라는게 없어진다. 어차피 나를 평가하고 나의 만족감을 주는 사람은 나이기 떄문에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서는 그리 중요해지지 않는다. 나를 욕하더라도 그 욕을 하는 이유가 내 자신의 기준에 비쳐 생각했을때 전혀 잘못한게 없는 것이라면 욕을 하든 말든 상관이 없는 것이 되고 그것이 잘못이라면 용서를 구하고 반성을 하고 내 자신을 용서하면 되는 것이 될 것이기 떄문에. 이렇게 쓰는 이유는 물론 내가 이렇게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고. 원수를 용서하라라는 말씀에서 원수가 혹시 나 자신 아닐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의도를 복잡한 율법과 경전으로 왜곡하고 자신의 편의에 맞게 해석하며 사람들 위에 군림한 바리세인들에게만 유독 불같은 화를 내셨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왜곡시키는 일이 이세상 어느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일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봤을때 교회는 아무리 성경에 기본을 두고 있다 하지만 매 주일 목사님의 성경 해석을 설교시간에 듣게 되고 결국은 그것은 목사님의 자기 해석일 뿐 나와 하나님의 관계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간혹 혹은 자주 그것을 이용해 목사님이 어떠한 지위나 이익을 얻기 쉬운 구조가 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를 나가는 것이 신앙을 가지것과 절대 동의어가 되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아직은 확실한 생각의 정리가 된 것은 아니지만, 교회나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나 말씀을 이해하는 필요악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말씀과 같이 사회가 만들어낸 하나님의 형상에서 결국은 자유해 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예수님은 나 자신이 선.악.을 분별하며 만든 세상과 사회가 만든 하나님의 모습에서 자유하길 바라셨던게 아닐까? 이부분에선 내가 혹시 독단과 교만에 빠져서 하는 생각이 아닐까 늘 조심스럽지만 결국은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무한의 창조주 하나님, 무한이라는 것과 없다라는 것은 결국 같은 의미가 될수도 있다. 무한이 있으면 그 것에 대해 인식이 사실 불가능하기에 무한과 없음은 혼동하기 슆게 된다. 그래서 무한한 하나님은 유한한 우리가 보기에 없다고 느낄 수도 있고 혹은 있다고 막연히 믿게 될 수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유한한 인간이 유한한 시간속에 인간에 의해 쓰여진 유한한 성경과 무한에 비하면 찰나같은 시간동안의 학습과 경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해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유한한 인간은 하나님의 뜻이나 형상이나 존재를 알수 없다. 알게 되면 이미 하나님은 무한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무한한 하나님을 아는 척 이해한 척 그만하고,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에 감사하며 살아 있는 동안에 최대한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힘쓰면 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른길, 가야할 길은 없고 오직 나의 길이 무엇인가 분별하는 것만이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감사하는 것이고, 나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용서하는 것이다. 사랑, 감사, 용서, 그리고 창조주가 만들어 주신 진짜 나를 인식하기.